
머리말
돈은 종교나 사상, 군대보다 강력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돈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당장 누군가에게 알리기 전에 10파운드짜리 지폐 한 장쯤은 내 주머니 속에 슬쩍 넣지 않을까? 아마 우리 중 대다수는 당국에 알리기보다 지폐 몇 장을 챙기려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히틀러가 영국 전역에 수백만 파운드를 투하할 계획을 세우면서 확신했던 생각이다. 히틀러는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을 몸소 겪었던 그는 화폐가 둘도 없는 무기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히틀러의 이념적 적이었던 블라디미르 레닌 역시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한 사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화폐를 남발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23일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에 실린 인터뷰에서 레닌은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의 구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화폐의 힘을 말살한 계획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 재무부는 매일 수십만 장의 루블 지폐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고의로 화폐 가치를 파괴하려는 것이죠… 자본주의 정신을 박멸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아무런 재정적 보장 없이 액면가가 높은 지폐를 전국적으로 남발하는 것입니다. 이미 러시아에서 100루블짜리 지폐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시골의 순진한 소작농조차 100루블짜리 지폐가 그냥 종이 쪼가리라는 걸 깨달을 겁니다… 그러면 자본주의 국가의 기반인 돈의 가치와 권력이라는 거대한 환상은 완전히 무너질 겁니다.
히틀러와 레닌은 이념적으로는 상극이었을지 몰라도 둘 다 돈이 가진 막강한 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돈의 기반을 무너뜨리면 사회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도.
영국 상공에 지폐 수백만 장을 투하하려던 독일 공군의 계획은 일급비밀이라서 나치 고위층 몇 명만 알고 있었다. 정직한 영국 국민 일부가 당국에 신고할 수도 있겠지만 히틀러는 영국 국민 대다수가 지폐 몇 장을 매트리스 밑에 쑤셔 넣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는 나폴레옹이 돈에 집착하는 ‘장사꾼들의 나라’의 국민이라고 일축했던 영국 국민들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위조지폐를 전국에 유통시키면 인플레이션이 사회에 큰 타격을 줄 텐데, 영국이 보유한 경제 자원의 상당량이 전쟁에 투입된 상황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그 당시 소비재와 필수품 등이 극히 소량만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에 물가가 불안정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 궁핍한 상황에서 위조지폐가 대거 유통되면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공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히틀러는 조용하고 순종적이었던 영국 국민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기를 바랐다. 영국 국민들이 자제력을 잃어 혼돈이 뒤따르면 블리츠 정신(Blitz spirit,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만 명의 사망자를 낸 독일 나치의 대공습에도 공포와 좌절을 이겨낸 영국의 공동체 정신)이 전복되어 전쟁에도 영향을 미칠 거라 예상했던 것이다. 1942년 7월, 히틀러의 신무기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 무기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수준으로 가장 정교하게 제작된 위조 지폐였다. 강제수용소 지휘관들에게 인쇄공, 조판공, 화가, 채색 전문가, 식자공, 종이 전문가, 전직 은행간부를 보내라는 전보가 날아 들었다. 영국 파운드화의 일련번호 순서를 해독해야 했기 때문에 이 작전에는 수학자와 암호 해독가도 필요했다. 제3제국 전역의 수용소들에서 끔찍한 정신적 충격으로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진 모습으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무리가 절뚝거리며 작센하우젠으로 끌려왔다. 이 142명에게는 영국 중앙은행(Bank of England, 영란은행)을 무너뜨리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강제수용소의 위조범들은 가짜 영국 화폐를 1억 3261만 945파운드 찍어냈는데 이는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75억 파운드에 달한다. 이 위조지폐를 영국 상공에서 투하하려면 독일 폭격기 중대가 있어야 했는데, 1942년 5월 이 계획을 준비하던 그 당시의 히틀러에게는 가능한 일이었지만 1943년 위조지폐가 준비되었을 때는 전황이 바뀌어 있었다. 독일은 전장에서 패배하고 있었고 독일 공군의 자원이 러시아에 집중되어 있어 대량 공습을 감행할 비행기를 확보할 여력이 없었다.
영국 중앙은행을 좌지우지하지 못한 히틀러와 달리 레닌은 러시아의 공식 조폐국을 가동하여 자신이 바라던 혼돈을 달성할 수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비슷한 목표가 있었다. 레닌의 말처럼 두 사람은 ‘돈의 가치와 권력이라는 거대한 환상’을 박살 내고 싶어 했다.
두 독재자는 모두 인간의 약점과 군중심리,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꿰뚫어 보는 악마 같은 관찰자들이었다. 돈은 종교나 사상, 군대보다 강력하다. 한 나라의 화폐를 건드린다는 건 가격체계, 인플레이션, 경제 문제뿐 아니라 대중의 마음 깊은 곳까지 건드리는 일이다. 히틀러의 위조지폐 투하 작전에 대한 이야기는 돈이 갖고 있는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경제학자의 맹점
돈에 대한 전 세계적인 논의는 우리 종족이 장악하고 있다. 신흥 종교의 대제사장과 마찬가지로 우리 경제학자들도 돈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할 책임을 맡고 있다. 통화 경제학자로서 내 경력은 아일랜드 중앙은행, 돈이 허공에서 마법을 부리는 성소라 할 수 있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성찬식 때 빵을 성체로 바꾸는 가톨릭 사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중앙은행장들은 쓸모없는 종이를 돈으로 바꿔놓는다. 기적치고는 꽤 인상적인 일이다. 우리 모두가 그 존재를 믿으니 그것이 실재하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실 돈은 추상적인 것이며 나머지 우리들(또는 나머지 우리들 대부분)이 그 존재를 믿기 때문에 가치가 부여된다. 돈 역시 믿음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든 상상력의 산물이다.
나는 아일랜드 중앙은행에서 투자은행으로 이직했는데, 거기서는 중앙은행이 마법을 보려 만들어낸 돈이 또 다른 형태의 돈, 우리가 신용이라 부르는 선동적 약속으로 다시 태어난다.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은 돈의 세계를 사실상 함께 운영한다. 세상에 돈을 얼마나 풀지, 누가 그 돈을 받을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떤 가격(금리)으로 보낼지를 이들이 결정한다. 이 기관들은 돈이 어떻게 순환하는지, 사회 곳곳에 어떻게 흘러 들어가는지를 설명해준다.
경제학자들은 돈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돈이 경제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흘러 다니는지를 이해한다고 해서 이야기의 흥미로운 부분까지 정확히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배관공은 물이 파이프를 통해 어떻게 흐르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이지만 물이 생명에 필수적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돈의 가장 흥미로운 면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이다. 돈은 우리 내면에 들어 있던 욕망이(그것이 선한 것이든 끔찍한 것이든) 밖으로 뛰쳐나오도록 유도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경제학자 집단의 열성적인 일원이었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사실 돈에 대해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돈에서 재미를 찾아낸다. 심히 감정적인 물질인 돈은 범법적일 수도, 섹시할 수도, 위험할 수도, 정신상태를 바꿔놓을 수도 있다. 돈은 권력이요 지배력이지만 해방의 수단이 되어줄 수도 있다. 돈으로 독립을 살 수도 있다. 돈은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에너지를 분출하게 만드는데, 그걸로 무엇을 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돈의 가능성을 주변에 전파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돈을 혼자만 쌓아놓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돈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하지만 돈을 가진 사람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성질을 갖고 있다. 탐욕적인 사람은 그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평등과 인권을 믿는 사람은 그 가치를 실현하는 데 돈을 쓸 것이다. 중요한 점은 돈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적 약속이라는 것이며 우리가 변하면 돈도 변하고, 돈 역시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좋든 싫든 오늘날 전 세계는 레닌이 ‘거대한 환상’이라 칭했던 이 요상하고 생소한 관념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수천 년 전에 도입된 돈은 현대 문화의 중심에 있으며, 하이테크 실리콘밸리에 살고 있는 부유한 투자자들도 올드델리에서 고생하고 있는 인력거꾼도 다 알아듣는 보편어가 되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 서로의 언어도 관습도 모르는 사람들도 돈을 통해 서로 소통한다. 돈은 인간과 재화와 아이디어의 흐름을 좌우하는 힘이다. 우리의 노력과 재능은 돈으로 평가받으며, 미래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돈의 초창기 특징 중 하나는 미래에 값을 매기는 능력, 즉 오늘의 시점에서 내일의 가치를 정하는 것이었다. 금리라는 게 ‘시간의 값’이 아니면 뭐겠는가? 3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받는다고 하면, 따로 시간을 들여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더라도 30년 후에 자신의 형편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는 할 것이다. 사실 그 행위는 돈을 통해 미래르 상상해보는 일이다.
돈은 노동자와 고용주의 관계, 구매자와 판매자의 관계, 상인과 생산자의 관계를 규정한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돈은 피지배자와 지배자 사이의 유대, 국가와 국민 사이의 유대 역시 규정한다. 돈은 쾌락을 실현하고, 욕망과 예술과 창의성에 가격을 매긴다. 돈은 우리에게 노력하고 성취하고 발명하고 위함을 감수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돈은 인간의 어두운 면 또한 끌어낸다. 탐욕, 시기, 증오, 폭력, 그리고 막대한 금전적 이익을 노린 식민지 건설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인간이 복잡한 존재이므로 돈 또한 복잡하다.
돈은 만악의 도구이자 평화의 도구
돈은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관계망이 촘촘해지는 이 세상을 뚫고 나가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 인간이 발명한 정교한 기술이다. 돈을 하나의 도구나 기술이라 생각하는 것은 돈에 대한 일반적인 사고 방식은 아니다. 우리가 돈에 대해 생각을 안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 원하지 않을 정도로 돈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먹고살기 위해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돈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여유조차 거의 없다. 돈이 부족하면 어떻게 해야 더 얻을 수 있을지를 걱정한다. 돈이 넘쳐나면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를 걱정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좀 더 많았으면 하고 바란다. 만약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십중팔구 그 길을 택할 것이다. 돈으로 자유를 살 수도 있다. 돈이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는 돈만 있으면 자기 인생에 대한 주도권이 더욱 강해져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이 우리 삶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도 우리는 돈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다. 따로 시간을 들여 다음과 같이 비교적 단순한 질문도 해보지 않는다.
‘돈이란 무엇인가? 돈은 어디서 오는가? 돈이 바닥날 수도 있을까? 그냥 돈을 더 많이 찍어내면 안 될까?’
어쩌면 이런 개념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돈이 얼마나 성공한 제도인지를 말해주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돈이 잘 돌아가고 세상이 잘 돌아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과거에는 인류의 발전에 대해 설명할 때 에너지 자원이나 물리적 기술 같은 요소에 초점을 맞췄다. 예를 들면 바퀴의 발명, 석탄의 발견, 쟁기의 등장 같은 것들이 그렇다. 하지만 인간이 공동의 목표를 추구할 때 협력에 도움을 준 사회적 기술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그 기술 중 하나가 바로 언어다. 인간은 더 정교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협력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수만 년에 걸쳐 언어를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사회적 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농업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이제 더 이상 가족, 친족하고만 살지 않게 된 인류는 낯선 사람들과 더욱 큰 규모로 영구적인 정착지에서 살기 시작했다.
돈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말은 누구나 들어봤겠지만 돈은 평화의 수단이기도 하다. 새로 생겨난 이 농경 정착 사회는 식량과 재산 때문에 이웃을 죽이기보다 돈을 이용해서 교육하는 법을 배웠다. 돈은 전쟁의 원인이 아니라 전쟁의 대안을 제공했다. 협상된 가격으로 다른 부족과 재화를 교환하면 되는데 뭐하러 피를 흘리겠는가? 교역을 하면서 사람들은 심지어 종교와 문화가 생판 다른 사람과도 이전 보다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재화만 교환한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와 규범과 혁신도 맞바꾸고 채택했다. 농업의 확립으로 인류는 발전의 길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 길은 결국 중앙집권화된 권력구조와 사회계급을 갖춘 도시, 국가, 제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수렵채집인으로서 인간은 대자연과 투쟁해야 했지만 땅을 개척하기 시작하면서 국가가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여분의 식량을 보유하게 되었다. 인류는 글쓰기, 기하학, 천문학, 숫자, 수학, 철학, 건축, 정치이론을 고안해냈는데, 이 모든 것은 문명이라 칭하는 것과 관련 있는 것들이다.
인류 문명의 톱니바퀴는 잇따른 기술 발전으로 돌아갔다. 가축의 사육과 다양한 식물의 재배 및 교차재배, 식량 보관법 개선, 해상을 통한 재화의 유통 및 수송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돈은 인간 번영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활력을 불어넣어준 근본 기술 가운데 하나인데도 간과되기 일쑤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돈의 뿌리도 깊어졌다. 화폐를 채택한 초기 문명은 그렇지 않은 문명보다 경쟁 우위에 설 수 있었고, 결국 현대 인류사를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혁신을 이끌었다. 우리는 돈이 파괴적인 기술이라는 것, 새로운 형태의 화폐가 지속적인 진화를 통해 기존 체제를 계속 전복시키고 이것이 다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진화를 촉발하는 피드백 고리로 이어진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호모사피엔스는 돈과 함께 진화했다
지난 5000년에 걸쳐 돈은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 더 나아가 인간과 지구의 관계까지 완전히 바꿔놓았다. 아마도 돈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의 본질을 규정하는 기술일 것이다. 우리는 돈과 함께 진화했다. 우리가 돈을 만들었지만 돈이 우리를 만들기도 했다. 고고학자들은 종종 인간을 ‘파이로파이트(pyrophyte)’종이라 칭하곤 하는데, 이는 불에 잘 견디는 종을 말한다. 이 책에 나오는 견해들을 연결해주는 실마리는 ‘플루토파이트(plutophyte)’종, 즉 돈에 적응하고 돈에 의해 개조된 종을 의미한다(이 말은 내가 만든 말이기에 언어 순수주의자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이 책은 호기심 많은 유인원인 인간과 한 놀라운 기술 사이의 관계에 관한 책이다.
다른 기술들과 달리 돈은 덧없다. 돈은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며 가치를 나타내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돈이 작동하려면 과감한 관념적 추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직관에 반하기는 하지만 돈은 희귀할 때가 아니라 풍부할 때 가치가 있다. 그런 면에서 돈은 인간이 가진 또 하나의 놀라운 기술인 언어와 닮았다. 돈과 언어 모두 집단 현상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돈도 쓰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가치가 놓아진다. 방언이 더 널리 쓰이는 언어로 흡수되듯, 처음에는 소규모 집단 안에서만 통용되던 여러 형태의 돈도 점차 더 넓고 유용하며 적응력이 강한 돈으로 흡수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국 달러다.
돈(즉 만인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보편적 가치를 나타내는 것)의 속성은 오늘날 조직화된 사회의 핵심적인 요소다. 돈은 지난 5000년 동안 가장 매혹적이고 가장 오래 버틴 아이디어 중 하나다.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한 인간 사회를 조직하는 다른 방식들도 모두(토지 기반의 봉건제도든, 신분제든, 공산주의적 해탈이든) 결국 돈을 중심으로 한 사회로 대체되었다.
수렵채집인에서 데이터 수집가로
친애하는 독자여, 이제 당신은 한 경제학자와 돈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는 동료 경제학자들의 돈에 대한 견해에 약간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이제 우리는 화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다양한 문명들을 살펴보고 각 문명이 어떻게 화폐를 혁신했는지 알아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돈을 다루는 능력이 글쓰기, 수리력, 법, 민주주의, 철학과 같은 혁신적인 발전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공진화共進化 현상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돈이 다른 발전의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발전이 돈의 진화로 이어진 걸까? 어느 쪽이 닭이고 어느 쪽이 달걀일까? 우리는 계산을 했다는 최초의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된 아프리카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이곳에서는 최초로 숫자를 계산했던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고, 어쩌면 그것은 원시적인 형태의 ‘부기(장부 기록)’였을지도 모른다. 돌멩이와 창이 떠오르는 구석기 시대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지만 말이다.
거기서 우리는 다시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정착촌에서 쓰였던 초기 화폐로 이동한다. 논리, 민주주의, 철학이라는 개념이 있었던 그리스 문명이 상업과 주화로 지탱되었다는 것과 위대한 로마제국이 정복이 아닌 신용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중세 초기 동안 유럽에서는 화폐 사용이 고전 문명의 다른 초석과 함께 쇠퇴했다. 유통되는 화폐가 감소하면서 발전이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11세기에 화폐가 다시 출현하자 서유럽도 피렌체처럼 앞을 향해 나아갔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도래를 알렸다. 우리는 16세기와 17세기 초 네덜란드 공화국에서부터 18세기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에 이르는 혁명기의 화폐를 살펴볼 것이다. 돈의 어두운 면은 돈의 이해관계가 인간의 존엄성과 대립했다가 애석하게도 돈이 승리를 거두었던 유럽의 식민 지배를 통해 드러났다. 우리는 다윈의 진화론부터 모더니즘을 거쳐 현재로 이동하면서 19세기의 돈과 자유주의 사상과 지적 진보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또한 화폐를 응용하는 동안 발견한 돌파구(금리, 주화 도입, 대차대조표 이용 같은)도 하나하나 살펴볼 텐데, 이러한 돌파구는 추가 혁신으로 이어졌고 한 가지 발전이 다른 발전의 도약대 역할을 했다. 화폐와 인간의 진보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화폐 혁신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각 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선택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이야기가 이어지며서 문명사를 진행시킨다. 이 책은 불그스레한 백인 아일랜드인이 더블린에서 쓴 책이다. 다른 사람이 다른 곳에서 썼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고 똑같이 타당했을 것이다. 내가 선별한 이야기들이 내가 글을 쓰면서 느꼈던 것처럼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게 읽히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기록으로 이름이 남아 있는 최초의 인물인 쿠심, 세계 최초의 경제학자 크세노폰, 네로 황제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단테, 피보나치, 구텐베르크, 표트르 대제의 세계로 방향을 틀었다가 조너선 스위프트, 샤를 탈레랑, 알렉산더 해밀턴과 시간을 보낸 후 찰스 다윈, 로저 케이스먼트, 제임스 조이스, 주디 갈랜드를 찾아갈 것이다. 암호화폐와 데이트하기 전에 우리는 세계 최고의 위조범을 알아보고, 2008년 베어스턴스가 몰락한 날 폭스 뉴스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난장판에 동참했다가, 현재 세계의 돈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을 만나볼 것이다.
그리스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준 죄로 제우스로부터 벌을 받았는데, 이는 제우스마저 인간이 불이라는 막강한 기술을 이용해 신을 제압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불이 인간과 지구의 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보여주는 전조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 네 가지 원소인 흙, 바람, 불, 물에서 빚어졌다고 상상했다. 이 힘이 우주를 형성했다. 약 5000년 전 인류는 또 다른 막강한 기술인 다섯 번째 원소, 즉 돈을 발명했다. 불이 고대 세계의 프로메테우스적인 힘이었다면 현대 세계의 프로메테우스적인 힘은 돈이다. 좋든 싫든 영리한 유인원이었던 인간은 이 세상을 만들었는데, 이는 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인류에 대한 이야기 그 자체라 할 수 있다.